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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어머니 ‘간호 패전기’ <제1편>

기사승인 : 2017-09-04 12:21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 2017年3月9日 松浦 晋也(마츠우라 신야) / 번역 : 오마니나

어머니가 치매일까? 설마! 아닐거야" 한창 바삐 일하는 자식들은 현재 부모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삶을 깨뜨리고 싶지 않는 법이다. 어머니의 노화와 치매 발병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결국 터무니없이 심각한 사태로 발전되어간다. 초기 대처의 실패와 사태인식의 안일함과 노화와 치매에 대한 지식과 정보부족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논픽션 작가인 마츠우라 신 씨가 실제 체험한 「간호 패전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함께 생활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고 확실히 인식하게 된 건 2014년 7월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예금통장을 못 찾겠어"라고 말한 것이다. 찾아보면 통장은 언제나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 또  며칠 후에 다시 "예금통장이 안보여"라고 해도 일시적인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어머니의 연금 입금통장에서 2개월치의 돈이 한꺼번에 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돈이 한 번에 인출되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지갑과 평소 현금을 보관하는 곳을 확인해 봐도 그런 큰돈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께 여쭤 봐도 "기억나지 않아. 나는 쓰지 않았어" 라고 하신다. 그 후 한참을 조사해 봤지만, 사라진 연금 1회 분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보이스 피싱에 당한 흔적도 없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집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마음 편히 살아오다가 직면한 간호 이야기

1934년생으로 이제 막 80세가 되신 어머니를 간호하게 된 간호이야기에 앞서, 먼저 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2014년 여름 현재 나는 53세로 결혼경험 없는 독신자로 아버지가 남긴 본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직업은 닛케이 비즈니스 온라인 독자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논픽션 작가로 과학기술 저널리스트로 자칭하며 취재나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형제는 2살 아래인 인프라 IT 기술자인 동생이 있는데 독신이고, 12세 어린 여동생이 이미 결혼해 세 아이의 엄마이다. 남동생은 도쿄에 거주하는데 워낙 바쁘고 독일기업에 근무하는 여동생은 가족과 함께 현지에 거주하기 때문에 그 들에게 어머니 간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즉, 아직 가정도 이루지 못했고 내가 하고자하는 것을 하면서 맘 편히 살아오던 50세된 한 독신남자가 느닷없이 간호라는 현실에 부딪혀 체험하고 느끼는 것을 기록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쓸 수없는 미묘한 사안은 약간의 각색을 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내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만해도 "뭐, 벌써 80세나 되셨으니 노화가 좀 심해지나 보다"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내 어머니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활발한 생활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해군이었던 아빠와 지방 명문가의 막내딸이었던 엄마 사이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전근이 잦은 군인 가정이 그렇듯이 어린 시절은 마이즈루, 사세보, 즈시같은 일본 군항 도시를 전전하며 자랐다.

2차 대전 후, 가족이 고향에 정착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셨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도 열중해 "미시마 유키오도 내 연극에 항상 왔었지"라며 "미모도 빼어난 편이였지"라는 말씀을 종종하셨다. 대학졸업 후 도쿄의 마루노우치에 본사를 둔 모 재벌 대기업에 취직했다. 취직은 내 할아버지의 해군 인맥 덕으로 보이는데, 비즈니스 걸(BG)이라는 단어를 아는 지 모르겠지만, 태평양 전쟁 이후 한동안 대기업 사무실에 근무하던 여성을 그렇게 불렀다. 말하자면 20대의 어머니는 당시 사회 최첨단이던 BG였던 셈이다.

여담이지만 이 비즈니스 걸(BG)이란 단어에 창녀라는 의미도 있다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말이 오피스 레이디(OL)라는 일본식 영어였다. OL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게 영향을 미친 고토 츠토무(五島勉)씨는 "노스트라 다무스의 대예언"이라는 책으로 한때를 풍미했던 사람으로 사회에 여러 작지 않은 해악을 끼친 사람이기도 하다.

영어과외도 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던 어머니의 일상

예전에 어머니는 1950년대 중반 대기업에 근무하는 엘리트 샐러리맨의 근무환경이 비할 데 없이 즐거웠다고 하셨다. 그런 사람들에 의한 결과로 일본의 생산성이 낮은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당시 젊은 여성은 ‘덤’으로 취급되어 제대로 할만한  일을 주지 않아 너무 한가한 나머지 직장에서 책을 읽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어머니도 영어책을 읽었는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와 중매결혼 후 당시 상식에 따라 고도부키 타이샤(당시에는 여성이 결혼하면 퇴사하는 분위기)한 후에 전업주부로서 우리 형제를 출산하고 양육했다. 자주 듣는 이야기지만 고부문제로 옥신각신하며 싸우다 하마터면 이혼의 위기까지도 갔었는데 용케 극복하고 살다 영어능력을 살려 중학생을 위한 소수 과외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오십대와 육십대는 영어과외로 마련한 자그마한 자금이 있어 여유롭게 국내외 여행을 다니셨다. 어머니가 일흔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에는 합창 동아리, 태극권 연습, 프랑스어에 스페인어, 중국어까지 배우신다면서 무척이나 바쁜 생활을 하셨다.

몸도 건강하고 병다운 병에는 걸리지도 않고 사셨기에 자녀들은 어느 사이엔가 ‘엄마가 이처럼 나이 들게 되면 주위사람에게 별 불편을 끼치지도 않고 장수하시다 돌아 가시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후에 되돌아보니 전조증상은 이미 1년 전 2013년 여름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항상 깔끔하시던 분이 청소가 귀찮아지면서 점차 정리정돈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동일한 시기부터 치약이나 케첩, 마요네즈 등 다 쓰지도 않은 것을 자꾸 새 제품을 뜯어 쓴다는 것이다. 이유는 냉장고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을 수 없자 여분으로 사놓은 것을 자꾸 열게 된 것이다.

상황판단이 명확해지고서 어머니의 방을 정리해보았더니 평소 자주 자신의 일정을 써놓던 수첩 기록이 2014년 2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일정을 관리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매일 3차례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습관이 있었던 어머니가 2013년 3월부터 조리하는 것이 귀찮아서 달걀덮밥 한 가지로 식사한다거나 예전의 어머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부실한 저녁식사를 일상적으로 드시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먹다가 흘리는 경우가 많아져 주위가 지저분하게 된 점도 눈에 띄게 나타난 현상이었고, 설탕 대신 소금을 쓴다든지 하는 양념 사용의 사고도 일어나게 되었다.

2014년 6월부터 가스레인지에 놓아둔 팬이나 주전자 등을 깜빡해 태우는 사고가 빈발했는데, 화재가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너무 화가 나서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께 주의를 주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걱정되어 곤로를 쓰지 못하게 말리니 차 마실 뜨거운 물조차 끓이지 못한다니 말도 안된다며 불평한다. 여동생이 생각다 못해 전기주전자를 보내서 "앞으로는 여기에 물을 끓이시라"고 강하게 피력했지만 그래도 곤로를 계속 사용하셨기 때문에 나는 어느 날 아예 주전자를 숨겨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 후부터 어머니는 전기포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7월의 "예금통장이 없다"는 소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8월에 접어들 무렵 어머니를 설득해 통장관리를 내가 하게 되었다.

‘병이 아니고 실수일 거야’라 믿고 싶었던 나

그렇게 많은 전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조들을 진행 순으로 정리해보면 분명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의 상황을 그저 나이때문에 생겨나는 실수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다가 "점차 쇠약해지더라도 어머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 이거 해드릴게요, 저것도 해드릴게요" 라고 하는 것은 겉으론 효자처럼 보여도 어머니가 할 수 있는데도 앞질러 처리해버려서 오히려 어머니가 약해지는 것을 더 빨리 진행시킨다고 믿었다. 조금 힘들다고 푸념을 해도 스스로 할 의지가 있는 동안은 스스로 하시도록 해야 한다! 통장관리 같이 이미 어머니 스스로 위험한 것은 내가 대신하되 그 외 스스로 하시도록 가능한 배려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치매가 아니라 단지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 생각하면서 나는 어머니의 치매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떠안는 것은 누구라도 싫어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번거로움과 곤란함이 내 삶 속으로 날아들어 버린다. 따라서 눈앞의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바로 이런 생각이 위기관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가장 큰 실패였는데 나는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간호 패전기"는 시작되었다.
아니 패전은 순간의 사건이니 오히려 간호 ‘패배와 퇴각(敗退)‘이라 할 수 있다.  상실되어가는 어머니의 일상생활 능력에 대응해 간호방법들을 생각하고, 증상의 진행상황에 따라 다음의 간호방법을?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는, 쇠약해져가는 어머니자신과 나 둘 사이에 간호란 패배와 전선(戰線) 재구성, 또다시 퇴각으로 이어지는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상하다고 눈치는 챘지만 결국

2014년 9월 무렵 어머니를 모시고 성묘를 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한동안 어머니는 월명일(月命日: 매달 오는 돌아가신 날)에는 반드시 혼자서 성묘를 다녀오셨다. 내가 " 매달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면, "아니야, 아빠가 섭섭해 하실 거야"라며 월명일 성묘를 중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이것이 반년  만의 성묘였다.

아버지의 무덤은 작은 언덕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어 묘지까지는 아주 완만한 언덕을 걸어가야 한다. 어머니의 심장과 다리는 놀라울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반년 전만해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던 길을 가쁘게 숨을 쉬면서 걸었다. 설마설마하던 나도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노화일까? 노화라기에는 쇠약정도가 좀 빠른 것은 아닐까? 언뜻 보기에 노화로 생각할 수 있는 현상이 실제로 병과 관련된 것이라면 질병에 대한 대처를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어머니의 상태가 이상하다. 의사에게 진단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메일을 동생들에게 보냈는데, 날짜를 보니 2014년 9월 26일이다. 그것이 햇수로 2년 반에 걸친 어머니와 나의 간호전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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