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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피는 5월의 봄날 같은 육영수 여사

기사승인 : 2015-06-01 17:23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지난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이 있는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6월은 숭모의 달입니다. 1일은 의병의날이고, 6일은 현충일입니다.
저는 며칠 전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을 가장 측근에서 오랫동안 모셨던 김두영 비서관이 쓴 회고록과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대양미디어 출판)”을 읽고 그 중에서 두 편 골라 논단으로 올립니다.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북한에서 만난 북녁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굼이 있을 수 없겠는가.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온 가족이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서 심지어 전국적으로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서글픈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1970년대 초 아카시아 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 해 늦은 봄날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대통령 영부인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조그만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 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보다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사연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받았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많이 도와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최신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집을 겨우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왔노라고 인사를 건넨 후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초막 같은 집에는 전깃불도 없이 희미한 촛불이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밥이 아니라 들판에서 따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메어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저 할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나는 가지고 간 돈과 쌀을 전해주고는 아무 말도 더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돌아오는 차중에서 내내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그 며칠 후 나는 박 대통령 내외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이야기를 했다. 내외분은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그때는 이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60년대 초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해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길에 야멸차리만큼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결심을….
크림전쟁(1853~1856)때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부상병을 돌보았던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받은 공훈 훈장증서에는 이런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 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가난뱅이 나라의 대통령이 그들을 눈물 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1970년대 초 성남에서 만난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 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그날 밤 내가 만난 올망졸망한 꼬맹이들은 지금은 50대를 바라볼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사법고시 준비생과 시골 처녀
1973년 봄에 충청도 시골에 사는 한 처년가 육영수 여사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사연은 이러했다. 시골마을, 산사(山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조그만 가게를 차려 놓고 장사를 하던 시골처녀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생활용품을 사러 가게를 자주 찾은 서울 총각과 서로 좋아하게 되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위자료를 줄 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요지였다.
영부인은 이 편지를 박 대통령에게 드렸다. 박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이 여자의 편지 내용대로였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와 진실을 수호해야 할 법관으로는 자질 면에서 곤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과 함께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법관 임용이 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0.26사건 뒤 수십 명의 변호사들이 마구잡이로 김재규 변호를 자원했을 때 초기 변호인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변론을 자원했을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그것이 지금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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