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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정녕 바보 병신 짓인가?

기사승인 : 2016-11-01 18:03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 희곡(戱曲)같은 우리 집안 이야기
1592년 4월 13일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지시로 조선반도 침략 제1진 선봉장인 코니시유키나가는 하루 만에 동래성을 함락시켰고 제3진 선봉장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4월 20일 김해성을 침공했다. 이때 김해부사는 4명의 의병장(재령이씨 대형, 청주송씨 빈, 의성김씨득기, 문화유씨 식)에게 4개 성문을 지키도록 당부하고 자신은 구원병 요청 핑계로 도망가버렸다. 4명의 의병장들은 일본군의 조총 앞에 칼과 창으로 대항하다 하루 반나절 만에 모든 병사와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조정에서 김해성을 지키고 가야문화유산을 보호하려다 순국한 4명의 의병장을 기리도록 사충단(四忠壇)을 만들고 조정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했고 이들에게 사후봉직으로 관찰사 및 예조, 이조, 호조, 병조 등의 참판직을 제수했다.
김해성 함락 이틀 후 4월 22일 13대조 할아버지(이대형)의 부인되는 고창오씨 할머니는 두 명의 아들에게 “장남은 후손을 잇기 위해 몸을 피해 도망가거라, 둘째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오도록 해라”고 명했다. 할아버지 대형은 가병(家兵)과 일꾼 등 머슴 120여 명을 이끌고 출병했기 때문에 할머니 명을 받은 아들은 겨우 20여 명을 규합하여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시신은커녕 한나절 만에 또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실신지경의 할머니는 곽재우 홍의장군 집안으로 시집간 질녀에게 연락했고, 남장을 하고 구원병을 이끌고 온 질녀에게 남편과 아들의 시신을 찾아오도록 명했으나 이들 역시 참패하고 질녀는 남장이 들통나고 왜놈의 겁탈을 피해 우물에 투신했다.
훗날 피난갔다돌아온 선조는 이 소식을 상소 받고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의 아름다운 충절이 있다고 하여 집성촌인 우리 마을을 판교리에서삼방(三芳)리로 바꾸도록 하고 큰 사당(제실)을 지어 하사하였다. 아들 역시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후 고창오씨 할머니는 70여 가구의 집성촌 우리 마을 전체 식솔들을 불러모아 “가문과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충성은 진정한 충성이 아니다. 이를 따른 우리 가문은 임진왜란으로 풍비박산 쑥밭이 되었다. 씨받이 남정네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나라에 충성은 이것으로 끝내자. 앞으로 씨족 번영에 노력하도록 하고 벼슬길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할머니 말씀은 1910년 한일합방 일제식민지가 되는 날까지 지켜왔다. 그동안 씨족번식의 효과로 남정네가 좀 늘어났는데 또다시 충성병(病)이 도졌는지 한낱 민초에 불과한 집안 남정네들이 창시개명을 거부하고 독립군을 따라가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고, 일부는 사할린 징용으로 끌려갔다. 1945년 해방 5년만에 6.25전쟁이 터졌고, 징집 나오면 남들은 도망가는 세상인데 자원입대하여 살아오지 못했고, 이때부터 마을은 과부집이 늘어나자 재혼이 허락되어 타성받이가 데릴사위처럼 마을에 입주하고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나랏님 모시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목숨 바쳐 충성하라”는 우리 아버지
1972년 1월 음력 설 이틀 후 재종형(당시 농림부 차관)이 전화로 “야, 임마. 네가 대통령 모시게 되었다. 보따리 싸들고 빨리 우리 집으로 올라오너라”는 말에 “경쟁이 치열했는데….”, “네가 ‘딱’이란다. 약간 무식하고, 운전에 주먹에 사격에 또 미8군사령부가 인정하는 한국 최고의 서양채소 전문가가 아니냐”, “월급은 얼마 주는데요?” 옆에서 대화내용을 듣고 있던 아버지가 “당나귀는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월급 따지지 말고 가거라.”(당시 쌀 한 가마니가 7,500원이고 면서기 월급은 7,900원이였음. 나는 자동차 2대를 가지고 부산지구 미8군에 농산물 납품을 독점하고 있어 큰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나랏님 모시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목숨바쳐 충성을 다해라”라는 말로 아버지는 충성에다 목숨까지 바치라고 했다.
부여받은 직책은 기능공인 ‘농장장’이었다. 당시 청와대에는 청소장, 온실장, 주방장, 관리장 등 별정직 ‘장’자 붙은 기능공이 많았다. 경기도 수원근교인 관악골프장 인접한 지역에 대통령 내외분 전용농장 책임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회고해보면 지금의 내가 아버지였다면, “눈치껏 살아라, 아부도 하고 재물도 탐해라”고 했을 것 같다.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을 강타하던 1974년 3월 하순, 대통령께서는 수원시 새마을연수원에서 지도자들과 토론하던 자리에 평택시의 어떤 지도자가 “각하, 새마을의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이 밥먹여줍니까? 돈벌이 새마을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항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대통령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는 당시 담당 보좌관님의 전언이 있었다. 며칠 후 농장을 찾은 각하께서는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겨울농한기에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고등채소 재배기술을 가르치는 실습학교를 만들겠다”고 답변했다. 할 수 있느냐고 묻길래 할 수 있다고 답변했고 다음 날 신갈 저수지 인근에 소재한 국군정보사령부 교육대로부터 접이식철의자 50개, 야전침대와 흑판, 책상 등 물자를 지원받아 사료창고를 개조하여 ‘신갈농민학교’라고 간판을 달고 그해 4월 1일 개학을 했다.
당시에는 고교를 졸업하고 군입대를 기다리는 장정들이 전국에 수만 명이나 있었다. 경기도내 경찰서와 농고에 연락하여 1차로 15명을 뽑아 입학식 했는데 주경야독으로 실습 6시간, 교육 4시간, 의무적 독서 4시간의 교육시스템을 3개월코스 완전무료 과정으로 운영했다. 집 사람 혼자 주방을 담당했다. 우리 부부는 연년생으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전봇대가 어머니 등으로 알고 자랐다. 이것의 원인으로 아들은 O형다리가 되었다.
청와대는 전혀 지원이 없었다. 담당 경호관(총경급)이 학생들과 상담하는 현장을 간혹 목격했으나 나처럼 농대출신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학교는 너무 잘되었다. 학생 수가 많을 때는 80명이 되기도 했다. 훗날 이곳 출신들 중에는 국회의원과 같은 유명인사도 다수 나왔다.
1976년 12월 9일 담당 경호관이 키와 가슴둘레, 옷과 신발 사이즈를 물으면서 이틀 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8시에 만나자고 했고 그날 새마을 훈장을 받는 것을 알았다. 새마을정신교육 부문에 故김준 원장이, 소득증대교육부문에 내가 받았다. 새마을지도자 복장으로 치장한 나에게 대통령께서는 훈장을 걸어주시면서 “고생많았다. 날 원망하였지”라는 말에 그만 울고 말았다. 40년 전의 일이다. (신갈농민학교(국제농업개발원)는 민족대백과 사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그날 우리 부부는 밤12시 청와대가 있는 쪽으로 돗자리를 깔고 대통령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아버지 당부대로 “목숨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여동생을 여군에 보냈다. 그때 내 몸 속에 충성병(病)의 DNA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미쳐 몰랐다. 1979년 10.26이후 13년간 추석과 명절 때 대통령 내외분의 제사를 모셨다. 간혹 같이 모시자고 찾아오는 새마을 지도자가 있었다.
훗날 전두환 대통령시절 학교가 전문대학 내인가가 나자 전경환의 새마을본부로 넘겨주었다. 그 시절, 중남미 아이티, 코스타리카 등에 새마을운동 지도와 모종의 임무를 맡아 다녀오는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같은 임무를 맡은 첼리스트 장한나 할아버지(장덕희 박사)는 풍토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985년 중남미 출장 중에 얻은 후유증으로 6개월의 병상생활을 끝내고 퇴원하는 날, 박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김정렴 회장(기념사업회)과 새마을운동의 야전사령탑 박진환 학장(농협대학)을 만나니 두툼한 봉투를 주면서 가지라고 했다. 김 실장께서는 “지금은 각하의 유언이 되었다. 박 대통령께서 자네가 학교를 잘 운영하면 신갈농민학교의땅(12,000평) 문서를 주고 그렇치 못하면 주지 말라고 했다. 그 땅 구입에 청와대 공금이 포함되어 절반은 국가재산이다. 요긴하게 사용해라”고 하셨다. 얼마 후 박정희에서전두환으로 권력을 옮겨탄 청와대 비서관들 중에서 이 땅의 내용을 알고 빼앗으려는 촉수가 다가옴을 느꼈다. 보조요원으로 데리고 온 고향후배에게 얼른 1/3면적을 잘라주고 관계를 차단했다. 후배는 지금 부자가 되었다. 나와는 성격이 반대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드디어 촉수와 정면으로 마주쳤고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학교는 넘겨주고 땅만 겨우 양보받아 처분(10억5천4백만원)하여 세금내고 남은 돈으로 박 대통령의 유언대로 국제농업개발원을 설립하고 해외 식량기지 확보에 나서게 되었다. 첫째 선택지로 중국 동북3성과 러시아 연해주를 점찍었고 이를 위해 농민들에게 새로운 해외정보 전달을 위해 월간지 「상업농경영」을 창간했다. 지금도 발행하고 있으며 내년이면 30년이 된다.
한ㆍ중 수교 4년 전인 88서울올림픽때 동북3성의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과 질곡의 세월에서 조국과 민족을 원망하는 듯한 그들의 눈망울에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이 시대에 노블레스오블리제가가당키나 한가?
노블리스오블리제를 가문 전체가 실천한 우당ㆍ성재 선생 6형제는 만주 봉천(심양)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입했다. 해방 후 6형제 중 막내는 가난하여 굶어 죽었다는 황당한 기록을 보았다. 성재 선생의 손자인 이종문은 내가 존경하는 친구다.
우리는 남한이 연고지인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근황과 북한에 연고지를 둔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비교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또 당시 일본 지배자 밑에서 아부하고 독립군들을 괴롭힌 밀정들의 후손들은 왜 대다수가 진보좌파가 되었는지, 또 독립군 후손과는 반대로 부유하게 사는지? 동북3성을 탐사하면서 진정한 민족 사랑과 조국 사랑에 회의를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독립군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비록 조국이 외면하더라도 나라도 돌보아야 된다는 엉뚱한 민족심(?)에 길림성매화구 제7, 제9중학교(두 중학교는 중국 최고 명문대학인 청화대학에 입학생을 가장 많이 배출한 조선족 유명학교다)의 학습교재 지원과 기숙사를 재건해 주었다. 한ㆍ중 국교가 수립되었어도 김일성이 세워준 학교라고 모두가 지원을 금기시하던 학교였다.
한국대학생봉사회를 이끌고 흑룡강성 상지, 아성 등지의 신흥촌, 월성촌 등 마을을 단장하고 다리도 놓아주기도 하고, 연변자치주에 있는 용정 여명농민 대학생 23명을 한국으로 불러와 교환학생으로 학비면제 공부 하도록 해주었다. 모두 독립군 후손들과 연고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반기문 유엔총장이 외교통상부 장관때는 거금을 지원받고 여기에 우리 재단 비용을 추가하여 심양 소가툰 지역에 한중농업연수원(건평 473평)을 건설하고 통학버스도 마련해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국가가 남몰라라 하는데 당신이 무슨 애국자라고 가산을 탕진하면서 그 짓(?)을 하느냐? 제발 정신차리라고 했다.
요즘 롯데그룹 비리사건과 한진그룹 부실경영사건을 보면서, 태극기를 외면하고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는 사람들, 국고를 내 돈처럼 탕진하고 패거리 정치를 일삼는 여의도 집단들, 또 도둑잡는 검찰이 도둑이 되는 세상에 내 자신이 또라이인지정부가 또라인인지 혹은 국민이 또라이인지가 좌우간 구분이 안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만약 김정은이가 남침했을 때 동북3성 조선족 동포들은 어느 쪽을 지지할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 부자(父子)는 연해주에 45년의 청춘을 바쳤다
주군으로 모셨던 박대통령은 통일신라보다는 화랑도를, 세종대왕보다는 이순신 장군을, 고구려보다는 광개토대왕을 더 많이 언급한 것이 어록에 나온다. 특히 광개토대왕의 언급은 당신께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더 넓은 요하평원을 보고 광개토대왕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한ㆍ중수교 한 해 전 중국의 지인으로부터 신라토기와 비슷한 3색채 도자기 한 점을 선물받았다. 중국세관에서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그냥 그런 물건으로 알고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수집가 친구에게 주어버렸다. 훗날 도자기를 얻어간 친구는 집사람에게 무려 5백만원이라는 금액을 용돈으로 쓰라고 준 사실을 알았다. 최소한 억대를 받고 팔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후로 도자기가 발굴된 조양시 서북쪽에 있는 내몽고 자치지구의 적봉산홍산문화유적지에 관심을 가졌고 그곳 문화유적이 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섰다는 것을 환단고기에서 보았다. 또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라는 것도 같이.… 그곳에서도 독립군들의 흔적을 보았다.
연해주를 한ㆍ소 수교 이전부터 다니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보하이(渤海)족의 흔적을 박물관에 또 기록으로 보았다. 연계하여 캄차카 북쪽에 코략(高麗岳) 국가조직을 발해 후예들이 세웠다는 것을 찾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서관 어디에도 자료를 보지 못했다. 최근 배재대학의 손성태 교수의 논문에서 비로소 보았다. 반면에 17년전 캄차카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로부터 자신들은 남북조(통일신라와 대진국(발해))시대를 공부했고 코략족이 세운 나라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 후 극동러시아 고위층에게 코략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니 우리가 개발해야 한다고 했더니 남ㆍ북 통일도 못하는 주제에 헛소리말라고 핀잔만 받았다. 그는 연이어 “투자만 한다면 얼마든지 활용해라”는 답변을 받았다.
YS정부말기 러시아 적십자와 공동으로 북한에 벼(나락) 3개 화차(180톤)을 보내면서 힘이 딸리고 언어능력이 빈약해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아들을 연해주에 정착시켰다. 오늘 현재 우리 부자가 연해주에 바친 세월이 45년이나 되었다.(내가 27년, 아들이 18년)

● 한국인이 쓴 학위논문이 러시아 국가정책으로 채택되다
러시아 학술원에 제출한 “극동러시아의 자원과 북한의 노동력과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한 삼위일체 공생농업”이 1998년 10월 푸틴 정부의 국가정책으로 채택된 것을 언론을 통해 알았다. 러시아 건국 이후 외국인이 쓴 논문이 국가정책으로 채택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한국정부는 누구도 칭찬이나 격려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러시아가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이었다면 당신은 영웅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연해주에서 벼농사를 지어 북한에 28차례 보냈다. 주로 함경남북도 지역이고 화차 벌크로 수송했다. 시골 정미소가 있는 간이역에 하차하면 주민들이 나누어 가졌고 방아를 찍지 않고 벼 자체를 맷돌에 그냥 갈아먹는 식의 취식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통일부(정동영 장관 재임때)가 주장하는 쌀은 인민이 먹고 벼는 저장을 위해 군대가 가져간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서울 안 가본 놈이 이긴다는 말 자체였다.
한.소 수교직후 연해주 아르센네프(헬기와 미사일 조립 군사도시)에서 북한노동자를 채용하여 과채류농사 시험장을 고려인 필립박(우스벡키에서 고등학교장을 했음)과 같이 했다. 말이 통하고 같은 동족이란 희망을 이들은 완전히 배신했다. 내가 한나절에 하는 일을 그들은 10명이 붙어서도 못했다. 하루에 10달러를 주는데도 말이다. 필립박은 러시아회사에 맡기자고 했고 러시아마피아는 북한노동자를 개ㆍ돼지처럼 회초리로 때렸고 내가 준 10달러를 절반만 받고도 꼼짝 못하고 순종하는 것에 결코 연민의 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당신들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이 꼴을 만들었느냐?”라는 질문에 보위부 감독관이 한국인 사업을 망치게 하는 것이 조국에 충성하는 길임을 강조하더라고 했다. 훗날 우리도 꾀를 내어 도급행태로 전향했더니 이번에는 죽을까 겁날 정도로 밤낮으로 일했다. 서로가 흉금을 털어놓고 통하기만 하면 되는데….

● 조국과 민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정녕 바보 병신짓인가?
북한을 자주 왕래하는 극동러시아 관계자는 “당신들은 말이 통하는 북한 인민들과 소통은 우리보다 나을 수 있어도 북한의 권력층은 우리가 더 잘 안다”면서, 연습없는 통일은 불가능하니까 사전에 연해주에서 식량생산을 위해 남ㆍ북ㆍ러 3국이 공동으로 통일연습을 해보고 수정하고 보완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한편 사드 문제가 터졌을 때 우크라이나산 콜추가 시스템이 가격도 사드보다 1/10밖에 되지 않고 한국 지형에는 더 효율적이라고 안보, 국방 관계관에게 건의했다. 고속도로에서 승용차가 편리해도 산악에는 4륜구동 짚차가 훨씬 효율적이듯이 콜추가와사드의 성능비교를 국민들 보는 앞에서 시뮬레이션 해보자고 했다. 답변은 사드는 무기가 아니고 정치 산물이고 이것에 관하여 언행을 조심하라는 경고성 충고를 받았다.
북핵 주변국(미ㆍ중ㆍ일)들 중에 유일하게 비자없이 마음대로 가는 곳은 러시아뿐이다. 한국 측에게 극동러시아 투자를 위한 모든 문호는 개방하면서 러시아는 2년이나 기다려주었다. 특히 지난 9월 2~3일 동방포럼 2차년도에 한국측의 획기적인 제안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물거품이 되었다. 이 틈을 타고 일본 아베와 중국 시진핑이우리가 진출해야 하는 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한국과 특별법을 만들어 극동지역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푸틴의 전략에 미국과 중국의 눈치만 보는 현재의 나라꼴이연락없는 100년 전의 모습이다. 주겠다는 것도 못받는 것은 겉으로 통일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통일을 거부하고 지금 이대로 안주하자는 조직들과 무엇이 다를까? 대통령의 측근에서 귀와 눈을 막는 무리들이 분명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으로 조국과 민족의 앞날이 걱정되고 충성하기도 어렵다.
아들에게는 이미 늦었고 손자들에게 들려 줄 유언을 “조국과 민족에게 충성은 미친 놈이 하는 짓이다”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는 자괴감에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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