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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전 산부인과’의 이민전(李民田)원장과 3쌍둥이와 4쌍둥이 이야기
  • (재)국제농업개발원
  • 승인 2017.07.31 15:33
  • 호수 355

베이비붐 시대가 지나고 한국에 바야흐로 저출산 시대가 도래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옛 표어가 무색하게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지자체마다 다투어 출산장려금을 올리고 있지만 생활이 점점 팍팍해지고 만혼이 늘어나면서 결혼한 부부조차 불임증으로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여 시험관 아기들도 늘어나고 있다.

과거 농촌에서는 밭을 매다가 출산을 하였다고도 하는데, 불과 60년도만 해도 가정에서 경험이 많은 산파들이 출산을 도왔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 임산부들은 산부인과를 정기적으로 찾아 검진하면서 태아의 건강을 체크하면서 병원에서 안전하게 출산하는 시대가 되었다. 극성스런 산모의 경우 아이의 출생날짜 뿐 아니라 시간까지 선택하여 출산을 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노련한 의사들이라 해도 아이들의 출생은 그 때마다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까싶다. 노산인 경우나 산도 쪽으로 향해야 하는 아이의 머리가 반대로 돌아가 있다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아가의 출생은 아가의 가족들에게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출산을 돕는 의사들에게는 항상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30년 넘는 세월동안 2만 명이 훨씬 넘는 신생아의 탄생을 도운 의사가 있어 화제이다. 바로 민전 산부인과의 이민전(李民田) 원장이 장본인인데, 한국 최초로 3쌍둥이 출생을 운명처럼 도운 인연과 연이어 4쌍둥이까지 받아낸 산부인과의로 이미 산모들 사이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흔히 옛사람들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좋은 자손을 얻는 것을 밭에 씨를 뿌린다고 빗대어 표현했는데, 백성 민(民), 밭 전(田)의 독특한 이원장의 이름은 산부인과의가 하늘이 내린 천직임을 느끼게 한다.

이민전 원장은 시골 무안의 9남매 집에서 태어났다. 유난히 공부를 잘하고 명석하던 그는 특히 수학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는데, 일반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미적분에 대한 이해가 특히 깊어 건축물에 대한 구상을 떠올리면 건물이 실제로 입체로 눈앞에 펼쳐질 정도였다고 한다. 특별히 부유하지 않은 시골집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이 9남매 모두를 공부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영특한 그는 자신의 꿈이었던 공학도의 길을 접기로 결정한다. 당시에는 공학도가 되어서는 많은 돈을 벌어 가난한 집안을 일으킬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학입학을 앞두고 그는 아버님께 ‘우리 집안에 의사가 한명이라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부친을 설득하게 된다. 만약 자신을 의대에 보내준다면, 의사가 되어 열심히 돈벌어 동생들을 모두 공부시켜 성공하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야무진 포부를 밝혔다. 그는 결국 부친의 배려로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인턴시험을 보게 된 그는 당시 인턴의 자리가 턱없이 부족해서 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뒷 배경이나 돈이 없으면 좋은 병원에 인턴으로 채용되기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된다. 차선책으로 부산의 메리노병원 인턴으로 채용약속을 받아두고 혹시나 해서 그가 원했던 서울의 유명병원에서 채용시험을 본 후 기대하지 않아서 연락을 취하지 않던 그는 그래도 궁금해서 병원에 연락하게 된다. 연락한 그는 깜짝 놀랐다. 그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만큼 힘들다던 서울 유명병원의 인턴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오후 4시에 전화를 걸었는데 5시가 마감이었고 그는 달려가서 등록을 하고 인턴과정을 밟게 된다.

당시는 베이비붐 시대여서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서로 다퉈 산부인과를 선택였다고 한다. 때문에 의대나 병원관련자의 자녀 등 일 순위가 산부인과를 원하는 마당이라 그가 산부인과를 선택하였지만,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 선배와 스승은 마취과와 다른 과를 그가 선택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워낙 출중하던 그의 학업능력 때문에 결국 다른 과 전공을 한명 줄이고 산부인과에 그와 일순위로 정해진 두 명의 의사가 배정되어 그는 결국 그가 원하던 산부인과의가 된 것이다.

의사가 된 후 3년간 그는 주간에는 근무하는 병원에서 일하고, 야간에는 수술 의뢰가 들어오는 병원에 가서 수술을 집도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에 말에 의하면 수술이란 출생한 신생아가 나오고 나면 원래대로 출산이전처럼 원상복구를 잘 시키면 되는 작업으로, 인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용이한 두뇌를 갖은 그에게 수술은 그의 뛰어난 공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일이었다.

3년 동안 남들보다 더 많은 출산을 도우며 열심히 일한 그는 본인의 힘으로 개봉동에 그만의 둥지를 틀어 민전산부인과를 개업한다. 당시에는 의료보험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로, 돈이 부족한 산모들이 아기 출생 후 부족한 돈만을 내밀며 나중에 갚겠다고 할 때면, 그는 항상 산모가족이 내민 돈에서 오히려 일부를 떼어 내주며 미역 값으로 쓰라고 했는데 이런 그의 선행이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알려져 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민전산부인과에는 산모들이 모여들어서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임신중독증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산모가
민전산부인과의 명성과 함께 돈이 궁해도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민전산부인과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배가 남산만한 산모는 이미 산독증으로 퉁퉁 부어 심각한 상태였는데, 초음파 검진결과 3쌍둥이였다.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산모의 생명을 자신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아이들의 생명 역시 보장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는 지체없이 바로 수술을 집도했고, 탄생한 아이들은 1킬로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숙아 상태로 태어났는데, 곧바로 인큐베이타에 들어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수술비는 무료로 해준다고 해도 출생한 세 명의 미숙아가 문제였다. 당시에는 현재처럼 인큐베이터 시설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서 종합병원에 가야만 인큐베이터 시설이 있었고, 비용도 천 여만원 정도로 매우 비쌌다. 급한 대로 출생한 3쌍둥이에게 임시로 산소호흡기로 호흡을 시키고 있었지만, 좀 더 지체되면 모두 생명을 잃게 될 상황이었다. 급한 마음에 그는 후배인 방송국 PD에게 연락해서 크리스마스이브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면서 자선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살릴 독지가를 찾는다는 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대부분의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서 방송을 들었고, 이 방송을 듣게 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연락을 주었으며, 성애병원에서는 앰브란스를 보내 3쌍둥이를 데려가 살리게 된다. 이 일로 그는 3 쌍둥이를 수술한 산부인과의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산모들의 입소문을 타고 많은 임산부들이 민전 산부인과를 찾아오지만, 민전 산부인과는 특히 쌍둥이 전문산부인과라고 할 만큼 쌍둥이를 임신한 산모들이 즐겨 찾는 병원으로 유명하다.

2001년 5월 이민전 원장의 수술집도 아래 건강하게 태어난 4쌍둥이

2001년 5월 어느 날 4쌍둥이를 임신한 임산부가 이 원장을 찾아왔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던 4쌍둥이 임산부는 한동안 오지 않았다고 한다. 네쌍둥이라는 엄청난 부담감과 두려움으로 개인이 하는 산부인과보다는 종합병원이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4쌍둥이 임산부가 이 원장을 다시 찾아왔다.

“처음에는 네쌍둥이라는 중압감 때문에 큰 병원이 안전하지 않을까 해서 한동안 대학병원에 다녔어요. 그러나 결국은 수술을 하는 것은 사람이지 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원장을 결국 네쌍둥이의 출산을 도왔고, 이 장면은 산모와 가족의 동의를 받아 전국으로 생방송되었다고 한다. 당시 수술은 33분 간 진행되었는데 노련한 이 원장의 수술집도 영상을 본 유명 산부인과 전문의는 그의 집도가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집도할 때 절대 같은 곳을 두 번 칼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시의사회 부회장까지 역임한 이 원장은 자신의 달란트를 잘 발휘할 수 있는 산부인과의가 된 것에 감사한다. 지금까지 2만 명이 넘는 신생아를 출산시켰지만, 항상 매 출산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고 말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 커진다고 말하는 그는 저 출산 시대에 대해 우려한다. 과거 어머니들은 나 자신을 희생해가며 자손을 낳아 키워왔으며, 이런 희생의 마음이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그런 아이들이 사회에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었다 면서 더불어 사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의 기본은 바로 행복한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이민전 원장은 건강관리의 기본을 좋은 물과 운동이라고 말한다. 평소 한 시간 거리가 되는 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도 항상 걸어 다니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는데 걷기와 등산, 그리고 스트레칭이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믿고 실천하고 있다.

또한 사촌동생의 권유로 알게 된 약산샘물을 지금까지 10년 넘도록 장복하고 있는 ‘약산샘물 매니아’로 좋은 물 ‘약산샘물’을 오랫동안 마셔서인지, 자신이 또래친구들보다 더 젊고 활력이 넘친다고 자랑한다. 상담과 수술 등 힘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남보다 많은 하루 1,8리터 2병 정도의 약산샘물을 항상 마신다고 하는데, 당뇨에 좋은 3가 크롬과 아연도 함유한 약산샘물을 장복해서인지 초기 당뇨도 사라지고 건강한 생활을 한다면서 차에 항상 넣고 다니면서 그로 인해 약산샘물을 많은 친구들이 마시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다.

약산샘물에는 특히 마그네슘이 풍부하게 함유되어있어, 임산부의 변비해소에 도움을 주기에 이민전 원장은 변비로 고생하는 임산부에게 약산샘물을 권하고 있다고 한다. 특별히 민전산부인과 부설 산후조리원은 특히 모유수유를 권장하고 있는데, 부득이하게 분유를 마시는 신생아들의 경우 분유 타는 물로 약산샘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생아들은 작은 세균에도 쉽게 탈이 나기 때문에 반드시 끓인 물로 분유를 타는데 약산샘물은 끓이지 않고 사용해도 안전할 만큼 믿을 수 있는 물이라고 이민전 원장은 이야기한다.  

이민전 원장은 2004년에 모교 조선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건물 ‘이민전 홀’을 희사하였다. 이 원장은 사망한 다음에 사회에 기부하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하기 보다는 열심히 일하며 사는 동안에 미리 사회봉사와 기부하는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실천적 생활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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