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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어머니 간호패전기 제9편 - 당신은 어머니의 속옷을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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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8 10:41
  • 호수 364

2017년 5월 18일 松浦 晋也(마츠우라 신야) / 번역 오마니나

2015년 5월  공적 간호 시스템의 도입과 병행해  나는 한국의 서울로 1주일간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World Conference of Science Journalists (WCSJ)라는 과학 저널리스트를 위한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고  나에게 우주개발과 관련한 세션에서 패널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던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생각해보고  거절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병세는 조금씩이지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간호생활이 지속되면  내 자신이 취재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처럼 논픽션 관련의 글쓰기는  직접 나가 다양한 정보를 계속 접하는 것이  업무를 지속할 수 있는 생명선이다. 취재가 없으면 글은 쓸 수 없게 되어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

도우미를 쓰는 단계로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말해준 것은  케어 매니저인 T씨였다. “마침 요양 간호 1급을 인증 받은 점도 있어  6월의 공적 간호보험제도의 점수는 충분히 있습니다. 마츠우라 씨의 서울 출장에 맞춰 도우미를 오게 합시다. 식사시간에 1일 3회  각각 1시간씩 도우미가 와주면  어머니도 그럭저럭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출장의 후반부터  독일에 체류 중인 여동생이 일주일동안 업무휴가를 받아 일시 귀국하기로 해  출장 중인 나로서는 손을 쓸 수없는 어머니의 여러가지 신변정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준비를 갖추고  6월 7일  나는 서울로 출장을 떠났다.

“융통성이 없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도우미의 작업 내용은 “신체 간호” “생활 지원” “상담 조언”이라고 규정되어있다. 신체간호는  식사와 목욕이나 화장실 옷 갈아입기와 손톱깎이 등 신체에 관련되는 것이다. 생활지원은 요리나 청소 및 세탁  장보기 등 생활에 필요한 일이다. 상담과 조언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규정은 매우 엄격해 예를 들어 청소라고 해도 유리창 청소나 정원의 잡초 베기  폭설 지역이라면 눈치우기 등은 그야말로 해준다면 감사하겠지만  그것은 직무 외의 일이다. 도우미 단독으로 쇼핑은 갈 수 있어도 치매환자 본인이 가는 쇼핑에 같이 갈 수는 없다.
융통성 없는 규정이라 생각되지만 엄격한 규정에는  간호 전문직인 도우미가 “편리한 가정부”로 끝도 없이 이러저러한 일로 업무를 강제 받게 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의미도 있다.

어머니가 이용한 방문 간호사무소의 경우  “직무 외의 것을 부탁할 때는  인건비를 모두 본인이 실비로 부담한다”는 운영 방침이었다. 나중의 일이 되지만  케어 매니저인 T씨는 이 시스템을 잘 활용해 “낮 12시부터 1시간은 간호보험제도 이용으로 식사 보조일을  오후 1시부터 1시간은 자비로  도우미의 쇼핑 동행”이라는 식으로 매우 유연하게 간호계획을 짜주었다. 내가 서울에 가있는 일주일 동안  어머니는 세명의 도우미의 도움을 받았다. 모두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는 60세 전후의 주부들이었다. 도우미라는 직종은 별도로 여성으로 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간호에 있어서 남성 도우미가 적합한 점은 없었다. 전국적인 경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도우미라는 직종은  자식이 성인이 된 비교적 높은 연령의 주부가 집안일의 경험을 살려  집근처에서 일하는 직업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궁합이라는 것이 있어서  도우미에 관해서도  간호 받는 측에게 “맞거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머니는 운이 좋았다. 나의 서울 출장 중에 와준 도우미 K씨  W씨  S씨에게는  그 후 적지 않은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몇 명의 도우미들이 왔었고  결국 어머니는 총 6명의 도우미에 지원을 받게 된 것인데  여성으로 세명은  주력으로서  어머니의 생활을 지탱해 주었다.
특히  K씨와 W씨는 그 후  떼를 쓰는 어머니를 아침에 데이 서비스로 보내는 요원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해주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역시 힘들었을 것 같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당신은 누구지? 왜 왔지?”라며 경계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확실히 강습을 받은 프로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어머니를 부드럽게 응대하며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주었다. 주말에는 동생이 와주었고  주 후반부터는 동생도 거주하면서  어머니는 도우미의 도입이라는 삶의 변화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우려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반드시 싫지만은 않은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안타깝게도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아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왔던 도우미를 가리키고는 “누구지  저 사람?”이라고 물었지만.
도우미의 도입과 병행해  어머니를 또 하나의 데이 서비스에 다니도록 하는 준비도 진행하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정오까지의 재활시간은  나에게는 거의 유일한 공백의 시간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의 하중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요양 간호 1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적 간호보험의 점수에서 보면  그 외에 주에 하루는 데이 서비스에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어머니는  건강한 시절부터 “노인을 한자리에 모아서 돌보는 장소”같은 것을 강하게 혐오했다. “노인을 모아놓고  하나둘 하나둘 유희나 시키는  그런 바보 같은 곳이 있나. 나는 그런 것에 도움 받지 않는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거야”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다. 이것은  자신도 그렇고  아마 읽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문제로서 현재의 데이 서비스 시설에서는  “노인에게 하나 둘 하나 둘 하는 유희” 같은 것은 시키고 있지 않다.
아마도 어머니가  “노인을 모으는 장소”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이 아버지  즉 할아버지를 간호했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서일 것이다.

사실  이 타이밍에 동생이 일시 귀국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어머니를 다니게 할 데이 서비스 시설의 선정 때문이었다. 귀국 중인 동생은 케어 매니저인 T씨와 상의해 곳곳의 데이 서비스 시설을 견학했다. 그리고  한 곳  여동생이 “여기라면 어머니를 다니게 해도 괜찮겠다”고 느꼈던 시설이 있었다.
주택가의 일반주택을 이용한 소수인원을 대상으로 한 데이 서비스 시설로  집에 있는 것과 같이 지낼 수 있다. 견학시점에서는 정원이 이미 차 여유가 없었지만  내 출장 직후  월요일에 여유가 생겼다는 연락이 와서  6월 말부터 어머니는  재활을 위한 데이 서비스에 더해 일반 데이 서비스도 다니게 되었다.
재활은 낮 시간 반나절이지만  보통의 데이 서비스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반 까지 7시간. 오고가는 시간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8시간이다.
이 데이 서비스 시설이 정해져  내가 얼마나 한시름 놓았는지. 간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던 것이  일주일에 하루 낮 동안은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

어머니 떼를 쓰다
그곳에 다니기 시작함에 따라  케어 매니저인 T씨가  대폭적으로 다시 정리해 간호계획을 작성했다. 어머니가 도우미를 받아들였으므로  그 외의 요일에도  며칠 정도는 도우미가 낮에 와서 식사를 만들어 주게 된다. 즉 그 날은 내가 낮부터 밤까지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데이 서비스는 우선 “해보는 것”이라고 해서 단시간 이용으로  본인이 친숙해질 수 있는 지의 상태를 살펴본다. 괜찮다고 판단되면  다음 주부터 이용이 시작된다. 어머니의 체험 데이 서비스는 6월 25일로 정해졌다.
이 날을 위해 케어 메니저 T씨와 상담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곳으로 보내기 위해 아침에 도우미 K씨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다. K씨가 “안녕~하세요”라고 소리높여 인사하고  “자 마츠우라 씨  오늘은 외출할거예요. 옷  갈아입을까요?”라고 말을 건다. 내 말은 듣지 않는 어머니라도  가볼까 하는 기분이 될 것이라는 전략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떼를 썼다. K씨가 왔어도 여전히 “가고 싶지 않다”고 우겼다.데이 서비스에 가려면 픽업하러 오는 차를 타고 다닌다. 그 차가 왔는데도 여전히 싫어 했다. 어쩔 수 없으므로 일단 물러섰다.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데리러 와달라고 해  겨우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몹시 애를 먹고 지쳤지만  K씨는 “누구라도 처음에는 이럴 겁니다. 별 일 아니예요”라며 웃었다.
오후 3시  짧은 데이 서비스를 마치고 어머니가 귀가했다. 그 표정이 밝아  그렇다면 익숙해질 것이라고 안심했다.

어머니의 속옷이요  내가 어떻게 알겠소!
또  한가지 여동생은 중요한 일을 해주고 돌아갔다. 그해 여름을 지낼 어머니 옷의 교체와 속옷 정리다.
여기에서 세상의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것은 계절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파악하고 있을까. 물론 나는 그런 것은 전혀 몰랐다. 어머니의 속옷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눈앞에서 갈아입으시던 시절 이후에는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줄곧  스스로 자신의 속옷을 관리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모든 것을 관리할 능력을 잃어  무엇을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원래 속옷을 보더라도 그 착용법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다. 유부남이라면 아내에게 속옷 정리를 해달라고 하겠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독신이다.

여동생이 와서  속옷을 바꾸고  일부는 구입해 정리해서 어쨌든 어머니는 더운 일본의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겨우 간호를 할 수 있는 모양새가 갖추어지고  앞으로의 전망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6월 말이었는데 이때 또 다른 심각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요실금이었다. 어머니가 실금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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