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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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꿈꾸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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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19 14:05
  • 호수 366

본인의 이름보다 공중부양으로 더 유명한 전 강기갑 국회의원. 그의 의정활동은 마치 전사와도 같았다. 8년의 정치를 끝내고 미련없이 고향 사천으로 내려가 농사꾼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강기갑 전 의원이 보여줬던 정치판의 강인한 모습 뒤에 숨어있는 한없이 부드러운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가 어떤 세상을 꿈꾸었기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지경까지 가도록 수차례 단식을 해왔으며, 국회에서 그 작은 몸으로 공중을 날며 저지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흙수저 머슴아들이 꿈꾼 희망의 새 세상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 남의 집 심부름꾼부터 시작하여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다. 그런 아버지의 8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바람처럼 공무원이 되지 않고 농업학교에 진학하여 농사꾼이 되었다.

수녀였던 넷째 누나의 영향으로 1973년에 세례를 받았고, 1982년 31살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약 6년 간 수도자로 살았다. 수도원에서도 공동체로 운영하던 밭을 혼자 전담하면서 농사를 지었던 그는 종신서원을 앞둔 1987년에 굽힐 줄 모르는 고집 때문에 수도원을 나오게 되었다.

1976년 임상협 신부의 영양으로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그는 생명공동체, 생명농법을 지향하는 가톨릭농민회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농민 운동가들은 대부분 사상범으로 몰려 감시와 통제를 받았고, 그 역시 가족들이 농민운동을 만류했지만 그는 옳은 일이라 여겨 계속 농민운동을 지속했다.

사천도 놀라고 그도 놀란 정치입문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시절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에 농민후보로 출마하면서부터 그의 정치운동은 시작되었다. 쌀 수입 개방과 WTO 투쟁 등으로 실형을 받았던 그가 사면을 받으면서 뜻하지 않던 국회의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18대 총선의 최대 이변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경남 사천의 혈투로 불리는 강기갑 의원후보와 한나라당 이방호 후보의 역전 드라마였다. 여당의 실세인 이 후보를 간발의 차이로 이기면서 그는 여의도에 입성했다. 당시 '흙사랑 농장'을 운영하면서 120마리의 젖소까지 키우던 농부가 정치 무대로 나가는 것에 가족의 반대도 심했지만 그의 고집을 막지는 못했다.

신앙을 지키는 마음으로 하는 정치

서울시청앞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을 향해 촛불을 들고 있다.

1987년 수도원을 나온 그는 다시 농사꾼으로 돌아가 농민운동도 다시 시작하여 가톨릭농민회 마산연합회 회장도 맡았다. 당시 농촌총각장가보내기운동의 책임을 맡아 일하면서 만난 박영옥님과 1991년 41세의 나이로 결혼도 한다.  

法(법)이라는 글자는 물이 가는 길을 의미한다. 물이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처럼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남들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정치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정치를 신앙을 지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현명하지 못했던 ‘공중부양’ 사건
2009년 1월 여야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국회 사무총장 책상에 올라가 발을 구르는 행동을 하면서 '공중부양 강기갑'이라는 별칭을 얻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후회가 되는 것이 바로 과거의 의정활동에서 보여주었던 ‘공중부양’이라고 말한다. 온 몸을 던져 얻으려 하던 것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게 한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그가 소속된 정당의 숫자가 적고 힘이 약하니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길게는 28일의 단식에서 시작하여 총 86일 간 단식을 했다. 다수결에 순응할 수가 없다보니 뜻하지 않게 공중부양이란 오명까지 얻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듯이
국회에서의 그는 수도생활 하듯이 의정활동을 이어나갔다. 묵상과 기도로 시작하여 마음 다스리기로 시작하며 신앙생활처럼 정치를 했다. 겨울에 난방이 들어오지 밤에도 의원실에서 숙식을 하며 몸살을 앓기도 했었다.

자신의 아픔과 고민을 넘어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정치를 해왔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처럼 중산층이 아닌 더 낮은 곳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회 밑바닥의 민중을 끌어안는 종교와 정치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모순과 오래된 구조적 모순을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고 피력한다.

또 다른 시작 “정계은퇴”

우연히 그는 농사지어 만들어 놓았던 매실효소에서 새로운 미생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이름을 따 K3미생물로 명명한 유산균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2004년에 시작하여 만 8년의 정치생활을 끝내고 국민 앞에 사죄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국회의원 세비마저 당에 납부하면서 청빈하게 생활한 그의 수중에는 빚만 남은 상황이다.

국회의원으로 있는 동안 키우던 많았던 젖소도 다 사라지고 농장은 황폐화되었다. 당장 적지 않은 가솔을 부양해야 하는 그에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는 농사지어 만들어놓았던 매실효소에서 새로운 미생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이름을 따 k3미생물로 명명한 유산균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뼛속까지 농사꾼 강기갑이 농민의 대변인이 되어야한다!
바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달에 한번 씩 국회에서 포럼을 갖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 산업화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는 강기갑 대표는 한국 미래의 희망을 미생물에 걸고 있다. 미생물을 활용한 그의 상생농법은 그에게 이런 확신을 갖게 만들었으며, 농업과 어업, 그리고 축산업과 의학계와 식품에 이르기까지 미생물의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사람 중심이 아닌 ‘상생 농업’이 답
한국 농촌의 해답을 그는 상생농업에서 찾는다. 상생농업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한국농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흙사랑 생태농장이 바로 그런 대안을 제시하는 모델하우스라고 볼 수 있다.

방사된 소와 돼지, 흑염소와 닭, 거위와 칠면조가 주인을 따라 자유롭게 다니는 모습이 마치 동물농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k3미생물로 발효되어 축사에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 상생이란 자연의 지혜를 깨달아 배양된 미생물로 제조된 가축사료를 가축이 먹고 다시 건강한 분뇨로 재탄생된다.

지속가능한 농업이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생태계를 살린다

흙사랑 상생농장을 운영하면서 120마리의 젖소까지 키우던 농부가 정치무대로 나가는 것에 가족의 반대도 심했지만 그의 고집을 막지는 못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과 편리함이 결국 땅을 죽이고 독성 농산물을 만들고 농민도 병들게 하니 독과 죽음을 창출하는 농업이 되고 있다. 농업의 이율배반적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농업은 반드시 상생농업이 되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299명 중 가장 낮은 자

바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달에 한번씩 국회에서 포럼을 갖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 산업화포럼"의 대표를 맏토 있는 강기갑 대표는 한국 미래의 희망을 미생물에 걸고 있다.

공중부양으로 공중을 날았던 그는 실은 가장 가벼운 국회의원이었을 수도 있다. 자그마한 키에 단식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그의 몸무게는 이제 겨우 53킬로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갖은 단식으로 그가 원한 것은 바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국민의 권리였고, 공중부양 역시 가장 낮은 자들의 대변인으로의 역할이지 않았던가!

촛불민심이 세상을 바꾸고 있지만 한국에는 아직 산재한 문제들이 넘쳐난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과연 국민을 대표하여 온몸을 내던져, 굶어죽기를 각오하며 투쟁하고 국민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횃불을 들고 앞장 서 줄 것인가 다시금 뒤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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