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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장수천 4] 북한의 신덕 샘물 국내 첫 수입

현찰은 없고 고사리 등 농식품물로 대체

기사승인 : 2018-01-09 20:39 기자 :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워낙 생산 품목이 없는 북한으로서도 샘물 사업은 1일 2-3천톤씩 쏟아지는 지하수로 수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대할 리가 없었다.

당시의 대북관계도 평화와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 현장을 답습하면서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진행되었다. (이후 금강산개발과 함께 온정리에 금강산샘물공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북한에는 생전 보지도 못했던 가볍고 파란 예쁜 18,9리터 용기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통에 물만 받으면 되고 이를 남한에 가서 팔면 되었다.

당시 그 누구도 신덕 샘물의 한국시장 진출에 회의적인 의견을 보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필자는 샘물 유통의 시장가격에서 비싼 신덕샘물로는 향수라는 북한출신들을 겨냥한 판매전략은 실패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바 있다)
아뿔사. 파랗고 예쁜 18,9리터 샘물 용기가 북한에만 들어가면 증발하고 말았다. 도무지 용기의 향방을 알 수 없었다.

북한 샘물 공장을 운영하는 무역공사에서는 그 누구도 샘물 용기의 향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측에서 상시적 감시요원을 붙일 수도 없고 샘물 용기는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1만병의 공병이 북측으로 들어가면 물이 담긴 병물은 고작 수 백병 정도였으니
기가 차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같은 샘물 공병은 북한의 부유층과 고위직 자택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국내 샘물회사들은 이들 공병의 회전율이 높아야 이윤율이 높아져 풀무원의 경우도 평균 30회 이상을 회전시켰다. 그러나 회전율이 높을수록 병의 색깔이 탁해지고 상처가 나 15회 이상만 가면 상큼하고 시원한 청량감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샘물유통시장이 전쟁터라 소비자가격은 90년대 초반보다 더 내려가 공병은 매우 귀중한 자산 1호였다. 초기에는 비록 남의 회사 공병이 들어오면 모았다가 맞교환을 하거나 그만한 비율로 계산을 하였지만 과당경쟁으로 치닫자 샘물회사들은 타회사 상표를 뜯어내고 자사의 상표를 부착하여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다.

특수 코팅과 강력접착으로 상표들이 쉽게 벗겨지지 않아 일부 생수통은 7-8개 회사의 상표가 겹겹이 붙여져 유통되기도 했다. 하지만 남한땅에서의 샘물 용기는 순환되었고 파손이나 회수 못하는 비율이 5-10% 정도였으나 북한에서의 회수율은 10%가 고작이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초창기 페트 샘물 용기는 손실율이 높았다.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가벼운 샘물 용기를 활용하여 식당에서는 허드레 물 담는 용기로, 세척제용기로도 활용했으며 점포나 일반 주택에서는 유류통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샘물 시장이 본격화되고 용기가 전국적으로 많이 파급되면서
이같은 손실율은 점차 낮아져 갔다. 또 하나 북한과의 무역에서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그들에게 달러는 없었다. 용기 값 등 남측인 프라스틱조합에 지불해야 할 달러 대신에 그들의 농산물의 고사리나 송이버섯 등 농산물을 대체품으로 지불했다. 그야말로 현대판 물물 교환이다.
하지만 고사리나 송이버섯의 상품 가치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크기도 작을 뿐더러 각종 벌레 먹은 생채기로 남한시장에서는 번번히 외면당하고 저렴하게 판매해도 남측 소비자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webmaster@iad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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