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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갓집 이야기

기사승인 : 2019-04-04 19:13 기자 : 김심철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이사장 이유미

나는 울릉도 명예군민 9호이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조상님을 둔 덕에 얻은 명예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일본에 의해 무너져버린 외갓집 ’배씨 가문‘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는 자손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의 족쇄이기도 하다.

1900년 10월 25일 초대 울도군수 배계주

나의 외증조부 배계주님은 울도군(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부속섬)의 초대군수로 조선말 국력이 쇠약해진 시기에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내려 애쓰셨다. 일본인들이 울도군의 소중한 원시림을 벌목해 가는 것에 항의하여,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어려운 일본과의 소송을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2차례나 진행하여 승소를 하신 자랑스런 조상이다.

원래 나의 외갓집은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직계자손이다. 왕의 사위 즉 부마의 집안으로 고종이 집권할 시점에는 외고조부이신 배현구님은 왕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기관인 돈녕부의 도정(都正) 직책(정3품)을 맡고 계셨다. 4대를 거쳐 내 손까지 내려온 외고조부의 정3품 교지의 날짜가 고종30년(1893년)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였으니, 1895년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등의 격동과 혼란의 시대에 살고 계셨을 조상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져 온다.

어머님께 전해 들었던 이야기들이 하나 둘 사실로 드러나면서 나는 조상들의 지나간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당시 정3품의 직책으로 왕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배현구의 둘째 아들인 배계주는 양반집 자제들이 신지식을 공부하던 독립협회에서 영어도 배우고 기독교와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당시 이완용과도 그 곳에서 교류하였을 것이고, 고종의 사위인 박영효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배계주는 갑자기 외딴 섬 울릉도에 들어가게 된다.

울도군수 칙명(광무 6년-1902년)

그 이전까지 공도정책을 쓰던 울릉도는 고려 공민왕 시절 신돈과 연루된 왕족을 유배 보내던 유배지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어머님 말씀으로는 어머님의 할아버님이신 배계주는 을사오적인 이완용에게 모함을 받아서 울릉도로 유배되었다고 전해진다. 울릉도는 공도 정책으로 인해 오랫동안 사람이 공식적으로 살지 않던 섬인데, 왜인들이 들어와 귀한 해산물을 채취하고 오래된 원시림의 나무들을 베어간다는 강원도 임한구 관찰사의 보고를 들은 고종은 이규원 감찰사를 보내 울릉도 시찰을 하게 한다. 1895년 결국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공식적으로 울릉도에 다시 백성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울릉도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진 조정에서는 이미 울릉도에 귀양 가있던 배계주를 도감으로 임명하게 되고, 당시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등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동해 조선의 요충지를 관리감독하기 위해 1900년 고종은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부속 섬들을 합하여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배계주 초대도감을 다시 초대군수로 임명한다. 당시 조선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특히 일본은 대륙으로 통하는 동해의 패권을 위해 울릉도와 독도가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기에, 1910년 한일합방 이전인 1905년 이미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지배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아관파천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러일전쟁에서 막강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에게 무참하게 격파되면서, 결국 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 치열한 전투가 바로 울릉도 앞바다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 금괴를 가득 싣고 침몰된 돈스코이호가 가라앉아 있다. 우리나라 손원일 초대제독의 손자이자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의 고문님이신 김윤식 회장님과 손명원 회장님께서 러시아와 한국이 협력하여 이 배를 인양하여 울릉도에 전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배현구 교지 1893년

1902년에서 1904년까지 이어진 러일전쟁이 안타깝게도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결국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심흥택이 울릉도 군수로 등장하고 망해가는 나라에서 조선을 지키고자 동분서주하던 나의 외증조부이신 배계주 군수는 “울도군이 대한제국의 ’요충지‘이니 잘 지켜달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조선의 멸망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독도라는 명칭을 심흥택이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심흥택을 모르는 국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심흥택의 서기가 돌섬이란 전라도식 이름인 독도라고 기록했다는 학자도 있고, 오히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빌미를 주게 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이 먼저 실효지배하게 된 울릉도와 독도에서 심흥택은 군수로 재직하면서, 일본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해오다가 그 공을 인정받아 나중에 승진하여 횡성군수로 발령받게 된다. 그 자손들까지 일제 치하 내내 호의호식하며 벼슬을 하고 사는 동안, 나의 외증조부 배계주 군수는 일제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하고 모든 활동이 일제에 보고되어 덕적도 섬에 숨어살다 나라 잃은 한을 품고 그 곳에서 숨을 거두셨다.

울도군절목 원본의 일부. 국세청 조세박물관 전시

당시 배 군수가 살던 집은 지금 덕적도 소야리의 마을회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일본스파이가 배 군수에 대해 보고한 내용들이 문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는 배계주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조선이 멸망해가던 시대의 역사이야기와 배계주 군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실화소설과 영화로 만들어 국민들에게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교훈을 남기고자 노력하고 있다. 얼마 전 고지도학자로도 유명한 국사편찬위원인 이상태 박사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배 군수가 소송했던 자료들과 승소한 자료, 그리고 박영효와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 등을 포함하여 배계주 군수의 첫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언론에 공개했던 ’울릉도 절목’이 가짜라는 둥 황당한 이야기와 논문들까지도 있었는데, 이상태 박사에 의해 명쾌한 자료들이 많이 발굴되어 진위여부를 확인하게 되어 자손의 한 사람으로 기쁘게 생각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라의 역사는 미래의 교훈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역사는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이 아니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르게 인식하지 않고는 미래에 암울한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잘못된 외교적 판단을 한 인조에 의해 나라전체가 철저하게 유린당했던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통치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극명하게 알려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병자호란의 시기를 연상시키고 있다. 우리는 광해군의 폭정을 이야기하지만 광해군 시절의 실리적 외교를 펼친 덕택에 국가적 안보가 굳건했다는 팩트는 슬그머니 감추고 살아왔다.
무엇이 중한 일인가? 무엇이 나라를 지키는 일인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고서는 미래의 한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냉정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재)국제농업개발원  webmaster@iad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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